[박상윤 칼럼] 교육 본질의 회복을 생각하며, 올바른 평가와 교사의 권위와의 관계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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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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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직에 들어선 지 어느덧 14년 차, 세상 그 어느 것 하나 변하지 않은 것이 없겠지만 교육 현장은 정말 많이 변했다. 내가 처음 교사를 시작했을 때와 비교해볼 때. 물론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14년이나 흐른 교육 현장만 변하지 않는 것도 이상하다. 그리고 교직에만 있었던 내가 다른 분야와 비교하며 교육 현장이 더 변했다고 단정 짓는 것은 맞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교육 현장에서의 그 변화의 모습이 그리 달갑지 않은 모습으로의 변화라 더욱 어색하다. 어색함을 넘어 가슴이 아프다. 최근, 교사들의 안타까운 죽음이 연이어 언론에 보도되고,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 때문이지만, 그 이유 하나로 가슴이 아픈 것이 아니다. 교육이 무너져 가고 있는 모습에서 오는 가슴 아픔, 먹먹함, 답답함이다.

교육은 아이들의 성장을 위해 그 기능이 작동되어야 한다. 그런데 과연, 세상이 변해가는 동안, 세상이 발전해 가는 동안 교육도 함께 발전하는 방향으로 변해갔는가를 생각해보면, 쉽게 동의가 되지 않는다. 일각에서는 요즘에 일어나는 일들의 원인으로 교권의 추락을 지적한다. 교사들의 권위가 바닥에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내 기준에서 그 지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교권이 추락한 것은 맞지만, 그 추락의 원인이 교사에게도 있다는 자성의 목소리는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권위는 그 누군가가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다른 누군가가 만들어 주지 않는다. 그 권위가 떨어질 때 역시, 다른 누군가가 억지로 어떤 의도를 가지고 떨어트리는 경우도 있지만, 스스로 그것을 떨어트리는 경우가 많다. 한 가정에서 아버지의 권위가 없다고 생각해보자. 왜 그렇게 되었겠는가? 그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아버지답지 못하고, 부인에게 남편답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원인도 분명 존재한다. 그렇다면 교사의 권위는 왜 추락했는가? 교사가 정말 교사다웠는지를 생각해보고 자성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 그래야 떨어진 권위를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법으로 권한을 강화해달라고 외치고, 생존권을 보장해달라고 교실 밖으로 뛰쳐나가 목소리를 높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말이다. 더구나, 아이들은 멀쩡하게 등교했는데 선생들이 미리 아플 예정인 병가를 쓰고, 아프지도 않은데 병원에 들러 진료확인서를 떼어가며 학교에 나오지 않는 방법으로는 권위의 회복은 커녕, 추락을 오히려 가속시킬 뿐이다. 오죽하면 이렇게까지 하겠냐는 말로는 명분도, 일반 국민들의 지지도 얻기 어렵다. 궁금하면, 한 번 찾아보라. 교사가 아닌 직종에서 어떻게 얘기하고 있는지. 각설하고, 교사는 교사다워야 하며, 어떠한 일이 있어도 교육 현장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 교사다.

교사는 전문직이라는 자부심이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최근 계속 언급되는 ‘교육의 3주체’라는 말도 참 아쉽다. 교육의 주체는 교사여야 한다. 학생은 학습의 주체이다. 그리고 학부모는 학생 양육의 주체 혹은 교육의 동반자라는 정도의 말이 적당해 보인다. 치료를 위해 소아과 병원을 찾은 아이와 그 아이의 부모를 두고, 의사와 함께 ‘치료 혹은 의료의 3주체’라고 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다. 교육의 주체는 교사여야 한다. 그런데 교사들 스스로 교육의 주체이기를 포기했기 때문에 교권이 추락한 이유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교사들 스스로 내려놓은 평가권이다. 교사는 아이들을 가르친다. 그리고 그 가르침을 통해 아이들은 성장한다. 그 성장은 올바르고 정확한 평가를 통해 확인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교사들은 그 평가권을 스스로 내려놓기 시작했다. 심지어 경쟁은 나쁘다며, 아이들을 불행하게 만든다며 평가를 거부하기까지 했다. 그리고는 과정중심평가, 성장중심평가라는 그럴싸한, 듣기에 참 좋아 보이는 말들로 포장한 평가를 했다. 아이들은 거의 대부분 ‘매우 잘함’이나 ‘잘함’이라는 평가 결과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이 정도면 됐다.’는 실체 없는 만족감에 빠져들게 되었다. 본인의 정확한 능력을, 객관적인 본인의 강점과 약점을 파악할 수 없게 되었다. 매우 잘함 – 잘함 – 보통 – 노력 요함의 4단 척도 평가에서 ‘매우 잘함’은 과거의 100점 만점의 시험 제도 였다면 76점 이상이면 받을 수 있다. 심지어 교육부나 광역 교육청은 모든 아이들 ‘잘함’ 이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인지, 재평가의 기회를 주도록 지침을 통해 권유까지 했다. 그것이 아이들의 성장을 위함이라는 허울 좋은 명목으로 말이다. 그러자 아이들이 재평가를 받지 않아도 ‘잘함’, ‘매우 잘함’을 받을 수 있는 아주 쉬운 평가지들을 개발하는 교사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 또한 교수–학습–평가 소위 ‘교수평’의 일체화라는 아주 그럴싸한 명분을 통해 일어난 현상이었다. 스스로 내려놓은 평가권으로 인해 학생들의 학력은 저하되고, 교사들의 권위는 추락했다. 학생들의 실력을, 능력을, 성취도를 정확하게 객관적으로 파악해 보고픈 학부모들은 사교육 시장으로 눈길을 돌렸다. 학생 교육의 주도권이 학교의 교사에서 학원의 강사들에게 넘어갔다. 우리 아이의 성적을 올려주는 학원 강사에 대한 존경심이 학교의 교사에 대한 존경심보다 더 커졌다. 학원에는 존재하지 않는 악성 민원이 학교에는 만연했다. 물론 나의 이런 이야기는 일부의 일을 너무 크게 과장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없는 일을 지어낸 것은 아니다. 분명 존재하는 현상이다. 

과거로 다시 회귀하자는 말이 절대 아니다. 평가권을 쥐고, 아이들의 미래를 담보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자는 말이 절대 아니다. 제대로 가르치고, 제대로 평가하자는 말이다. 아이들의 제대로 된 성장을 이끌어 낼 수 있도록, 아이들의 강점과 약점을 제대로 파악해서 능력을 키워주자는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 제대로 평가하자는 말이다. 교사들 스스로 내려놓은 평가권을 다시 손에 쥐자는 말이다. 아이들의 실력을 확인하고 싶어 학원으로 가지 않아도 되도록 하자는 말이다. 

나는 우리 학급의 아이들에게 자기 자신만의 ‘비교우위’를 찾으라는 말을 자주 한다.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정확하게 파악해서 강점은 발전시키고, 약점은 보완하라는 말과 함께 말이다. 상대방을 꺾고, 물리쳐서 승리하라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능력을 키워 각자가 우리 사회의 발전을 위해 기여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자고 말한다. 그 발판 마련을 위한 방법 중에 하나가, 나 자신의 실력과 능력을 정확하게 파악해보는 것인데, 그래서 제대로 된 평가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을 하면 5학년 아이들도 납득을 하고 진심으로 열심히 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성장을 한다. 그런데 그렇게 아이들도 납득하는 ‘평가가 필요한 이유’를 애써 외면하는 교사들이 있다. 그 목적까지는 깊이 있게 알 길이 없어 모르겠으나, 어쨌든 여전히 평가는, 경쟁은 나쁘다는 말을 하는 교사들이 있다. 그런 교사들이 전부 다 나쁘고 잘못되었다는 말을 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과연 그런 교사들에게 학생과 학부모들로부터 나오는 존경심과 권위가 있을지는 참으로 의문이다.

지금도 어디에선가 아픔을 겪고 있고, 정말 삐뚤어진 인격을 가진 이들로부터 말도 안되는 괴롭힘의 고통을 겪고 있는 선생님들에게는 정말 미안하다. 그러나 그런 아픔을 겪는 선생님들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선택하는 선생님들이 더 이상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감히 말한다. 우리 모두 교사다워지자. 교사로서, 스승으로서 존경받는 진짜 선생님이 되자. 땅에 떨어진 권위를 누군가의 도움을 통해서만 돌려놓을 생각하지 말고, 우리 스스로 되찾기 위해 애써보자. 교육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 ‘학생은 학생답게’, ‘학부모는 학부모답게’를 외치며 교사가 먼저 교사다워지자. 교육의 주체임을 잊지 말고, 스스로의 전문성을 키우는 교육자로서의 삶을 살아보자. 그 교육자로서의 삶을 사는 방법에 ‘평가권’이 있음을 절대로 잊지 말자. 이 세상에 나쁜 평가는 없다. 나쁜 것이라면, 그 평가의 결과를 이용해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거나 아이들을 구분 짓는 악용이다. 그 악용을 막자고, 평가 자체를 나쁘다고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다.

출처 : 서울미디어뉴스(https://www.seoulmedi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