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의 한 마디가 왜 중요한지 나는 안다

작성자
그쌤
작성일
21-01-24
조회수
23,768
댓글
1

“에미야. OO이 미술학원 좀 보내야 할 것 같더라.”

영문을 몰라 하는 내게 하신 어머니의 설명은 같은 교사의 직업을 가진 ‘어미’를 분노에 떨게 하는 이야기였다.

집으로 와야 할 초딩 1학년이 하교 시간을 훌쩍 넘기고도 도착하지 않았었단다. 귀가해야 할 아이가 도착하지 않으니 걱정은 당연했다. 

걱정이 되신 어머님은 학교에 슬슬 아이를 찾아 나서셨던 것 같고 혼자 교실에 남아 이른바 ‘나머지 공부’를 하고 있었던 아이의 모습을 보시게 된 거 였다.

 

집으로 네 살 터울 제 누나가 학교 다니며 공부하는 것을 어깨 너머로 동영 하고는 겨우 한글을 깨치고 초등학교에 입학한 둘째에게 나는 별반 선행학습을 시키지 않았었다.

지금이야 최전방 군복무까지 씩씩하게 마친 늠름한 ‘복학생 아저씨(?)’이지만 그때만 해도 말갛고 조그만 여덟 살짜리 애기였다. 젖살이 통통한 아이는 사무를 보고 계신 선생님 앞에서 땀을 삐질 흘리며 뭔가(나중에 집에 와서야 아이가 그림을 그리느라 남아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으신 모양이다.)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었고, 일찍 끝날 것 같지 않아 그냥 되돌아오신 어머니는 못내 속이 상하셨던지 ‘어미’에게 하신 말씀이 미술 학원 보내라는 말씀 이셨던 것이었다. 

왜 남아야 했는지 물었다.

“오늘 다른 애들 다 가는데 왜 남아 있었어?”

“선생님이 토끼 그림 다시 그리고 줄긋기 하라고 하셨어요.” 

“토끼를 왜?”

아이가 내놓은 토끼는 내가 봐도 우스꽝스럽게 귀가 뭉툭한 것이 엽기토끼 마시마로 같았다.그러나 토끼의 생김이 문제가 아니었다.

결국 아이가 이어 뱉은 말이 나를 화나게 만들었다.

 

“선생님이 토끼는 하얀색이래요. 난 토끼가 추울까봐 파란 잠바를 입혀주었는데.”

아이가 그린 토끼는 못난이 마시마로 같았고, 온통 파란색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스머프처럼. 왜 토끼가 파란색이면 안 되고, 빨간색이면 안되나! 실제로 얼룩덜룩한 토끼도 있고 잿빛 토끼도 있다. 아이의 상상 속에 사는 토끼는 본래 파랄 수도 추우면 파란 점퍼도 입을 수 있고 초록색 옷도 입을 수 있다. 

자신의 머리통 속 토끼가 흰색이면 초등 일학년 아이들의 토끼도 온통 흰색이어야 한다는 어떤 선생의 주장! 모조리 토끼의 귀가 뭉툭하면 안 되는 것일까? 토끼가 온통 흰색이 아니면 안 되는 것일까?

다른 애들이 다 집에 가도록 점심도 제때 못 먹고 남아서 토끼를 그려 대던 아이는 결국 미술을 싫어하게 되었다. 미술학원을 보내주려 해도 싫다고 했다. 자기는 학원에 다녀도 미술을 잘 못할 것이기 때문에 미술학원은 다니지 않겠다고 했다. 억지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내 가슴 속엔 결코 되고 싶지 않은, 아니 되어서는 안 되는 교사인 중 한 명으로 그 교사가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해마다 아이들이 고등학교 졸업을 할 때까지 나는 애들 선생님들을 찾아가 인사를 하는 나만의 관행이 있었다. 관행대로 찾아갔을 때 그 교사의 한 마디는 역시 근 20년이 다 되어가지만 지금도 또렷이 기억이 난다. ‘아! OO어머니가 고등학교 선생님이시구나. 우리가 제일 싫어하는 부모 직업이 고등학교 선생님인데. 너무 바쁘셔서 애들한테까지 신경을 못 쓰시더라구요. 준비물도 잘 까먹고.’

 

그래 어련하겠나! 당신에게 잘 보이자고, 못난 내 새끼 관심 가져달라고 뇌물도 좀 갖다 바치고 해야 하는데 그런 거 잘 못하는 뻣뻣한 고등학교 교사들. 그러니 어련하시겠어! (물론 모든 초등교사가 그렇 단건 절대 아니니 오해를 하시지 말길 바란다. 재수 없게 우리 아이의 초등 1학년 담임이 이런 사람이었을 뿐이란 회고담이다.)

아이의 상상력을 박살내 버린 그 교사 덕에 아이는 지금도 미술에 별 관심이 없다.

한번 들은 음률을 잘 기억해내고 음악에 관심이 깊은 것에 비하면 미술은 뒷전이다.

 

‘파란 토끼가 사는 나라의 핑크 토끼는 어디 숨었냐’고 한마디만 물어줬으면 상상 속의 토끼 나라 이야기로 신나서 이야기를 했을 것을!아이들의 꿈동산 이야기로 토끼를 수도 없이 그리며 마시마로가 더 잘생긴 토끼로 변신하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일 것을.

교사의 한 마디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는 어떤 교사는 오늘도 열일곱, 열여덟, 열아홉 아이들의 꿈을 보살피고 있다. 상상력을 동원하기엔 조금 커버린 아이들이지만, 자신의 미래를 꿈꾸기에는 충분히 어리고 젊으니까. 

오늘도 고약한 그 교사가 떠오르니 ‘어미’는 기어이 열을 받고 만다.

 

 

#아이들의_상상력은_무죄다 #교사는상상력의길잡이가되어야한다 #마시마로토끼 #파란토끼도살수있어야한다 

댓글목록

ahava님의 댓글

ahava 작성일

그때 받은 상처가 크셨군요..
선생님의 글을 읽고 더욱더 아이의 눈에서 바라보도록 힘써야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앞으로 내가 맡을 아이들..그리고 나의 자녀들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