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교육청은 지난해 12월 ‘올바른 노동관’을 가르치기 위해 《노동인권지도자료》를 제작, 지난 3월부터 일선 고등학교에 배포했다. 이 교재는 사회 과목은 물론 국어·영어·음악 등 거의 모든 학과목과 연계해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이른바 ‘진보’ 교육감들은 이 교재가 성공적으로 활용될 경우 유사한 교재를 제작·배포할 것으로 보인다. 현직 교사인 필자가 이 책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그래서이다.
총 24장 48차시로 구성된 이 교재에는 올바른 직업관이나 상생(相生), 화합과 기능적 사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공정무역을 가지고 세계화(世界化)를 가르치고, 노조(勞組) 파업을 통해 기업을 이해시키려 한다. 경력단절 여성 이야기와 조선시대 여성까지 불러내어 여성 인권을 가르친다. 전태일을 거의 ‘노동자의 신(神)’으로 격상시키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내용이 빼곡하다.
외눈으로만 보는 ‘노동’의 의미 |
《노동인권지도자료》는 노동의 괴로움을 보여주는 그림들을 제시하면서 토론을 요구한다. |
〈예술 속 노동의 재발견〉, 교재의 여러 부분에서 ‘노동’의 의미와 중요성을 제시하지만, 기득권층의 억압과 착취에 의해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소외된 계급으로서의 노동자만 인정한다. 노동의 중요성을 개인·기업·사회 측면으로 구분해 기술하되 ‘사회’ 차원의 구분은 기능적 사고보다는 갈등적 사고에 기인한 사례로부터 출발한다.
노동에 의해 생산된 재화, 서비스는 다른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키며 국가 경제에도 기여
(예) “내게 소중한 스마트폰도 누군가 힘들게 만든 거겠지?”
(교재 21쪽)
노동의 고통과 상대적 박탈감에 대한 이야기가 반복된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내용은 ‘노동을 괴롭게 만드는 요인’들이다. 귀천(貴賤) 의식, 차별, 열악한 환경, 산업재해 등이 강조된다. 근로와 직업을 통해서 사람이 얻을 수 있는 보람이나 즐거움이나 행복함에 대한 언급은 고작해야, ‘노동자는 노동을 통해 소득을 얻고, 성취감을 느끼고, 사회적 관계를 형성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한다’ 정도로 기술(記述)된 것이 전부다.
이어서 등장하는 〈꿈의 직장〉은 ‘노동의 재발견’을 위해 ‘시장경제의 발전을 위한 기업가와 노동자의 역할을 이해’하여 ‘노동자의 권리와 기업가의 사회적 책임을 지향하는 태도’를 기르는 것이 학습목표다.
우리가 직업을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기준은 무엇일까? 직장을 통해서 받을 수 있는 급여에 대한 선호도나 자아(自我)실현, 장래성 등이 매우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이 교재에서 강조하는 〈꿈의 직장〉은 복지에 가장 큰 비중을 두는 곳이다. 예를 들어 학생활동지에서 ‘꿈의 직장 공모전’을 제안하며, 회사의 제일 목표는 이윤 창출일지라도, 목표 추구 과정에서 지켜져야 할 약속은 노동자와 소비자에 대한 책임의식임을 강조한다. 나아가 기업은 직원에 대한 복지가 소홀해진 것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을 가져야 하며, ‘꿈의 직장’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복지’임을 강조한다. 기업가의 역할은 단지 노동자를 위해 복지정책을 마련해주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 보다.
회사가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항목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려는 방법으로 ‘공모’의 형태를 선택했고, 이 수업의 모든 활동과 자기 평가의 루브릭(Rubric·학습자가 과제를 수행할 때 나타내는 반응을 평가하는 기준의 집합)은 ‘창의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하지만 근로 환경 개선, 노동자의 권리 보장, 근로 조건 향상, 노동 인권 향상에 얼마나 많은 기여를 했는지 등이 매우 중요한 평가 항목으로 나타나 있는 것을 보면, 이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분명해 보인다.
행복은 ‘궁극적으로 스스로 자신의 삶에 대한 구체적인 목표를 정하고, 이에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도전하여 끝까지 노력하는 데’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성취를 위해 건강하게 노동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행복을 실현한다는, 직업과 직장의 긍정적 의미는 이 책에서 가르치지 않는다. 이 책으로 공부하는 학생들은 모두 앞으로 ‘노동인권 지키기’에 골몰해야 하는 처절한 노동자의 삶만이 예약되어 있다. 세상에 온통 노동자만 존재한다면 이 교재가 유용할 수도 있겠다.
페미니즘의 시각으로만 보는 여성 노동 교재 중 〈우리 동네 구자명씨〉라는 단원에서는 가사(家事)와 노동의 이중고(二重苦)를 치르는 경력단절 여성의 성차별을 강조한다.
그러나 최근 미국에서 발표된 실업률 통계를 보면 오히려 여성의 실업률이 더 낮게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실업률 통계는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보여주는 자료로서, 노동시간이 유연할수록 실업률이 낮아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성의 경력단절이나 실업 문제는 오히려 노동시장의 유연성과 관계지어 보아야 하는 문제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 교재는 그런 사실은 간과한 채 남녀차별 시각으로만 이 문제에 접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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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취업률과 출산율의 관계를 보여주는 고등학교 사회문화 교과서(출처=지학사 사회문화). |
고2 학생들의 사회문화 교과서에 실린 여성의 취업률과 출산율의 관계를 보여주는 자료를 보자. 임신·출산·육아를 위한 휴직이나 시간제 취업 등 노동유연성이 확보되면 여성 취업률은 높아질 수도 있고, 그러면 저출산 문제도 돌파구가 생길 수 있다는 유추(類推)를 하게 한다.
고용의 유연성은 기업의 자율성과 관련된다. 여성 취업률이 낮은 것을 성차별 문제로만 접근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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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인권지도자료》는 조선시대 여성 노동의 문제를 전근대성의 문제가 아니라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
〈히든워커스 조선여인노동열전〉 단원에서는 조선시대의 여성 인권을 다루며 다시 한 번 ‘페미니즘’을 불러들인다. 가사노동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노동의 현장에서 힘겹게 노동에 시달리는 여성의 모습을 조선시대를 통해 조망한다.
조선시대 여성이 힘겨웠던 것이 그들이 단지 여성이어서였을까? 오히려 근대화되지 못한 전형적인 신분제 사회의 인권 문제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남성들도 그 시대에는 인권의 사각(死角)지대에 던져져 힘겨운 노동에 시달렸다는 것도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 교재는 조선시대 여성 노동의 문제를 여성 인권의 문제만으로 몰고 간다.
勞組, 협상은 없고 투쟁만 강조 |
《노동인권지도자료》는 노조와 관련해서는 협상보다는 투쟁, 부정적 측면보다는 긍정적 측면을 강조한다. |
〈노동조합, 어디까지 알고 있니?〉 〈협상의 기술을 발휘하라!〉 〈파업이 가져온 변화〉 단원에서는 집중적으로 노동조합을 다룬다. 드라마 〈송곳〉, 동화 〈CLICK, CLACK, MOO Cows That Type〉과 영화 〈카트〉 등을 통해 사용자인 기업과 노동자의 관계, 노동 조건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 등을 드러내고자 한다. 노동조합이 왜 만들어져야 했는지, 노동조합이 보여주고 있는 행태와 활동에 대해서는 긍정적 측면만 강조한다. 파업 등 극단적 상황 전개는 노동자를 고용하는 기업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기술했다.
게다가 노동자가 선택할 수 있는 수단으로 파업(罷業)·태업(怠業)을 가르치면서 협상의 중요성은 별도로 가르치지 않는다. 단체교섭권에 대해서도 스치듯 설명할 뿐이다. 합의가 결렬될 때 사용자가 사용할 수 있는 방법으로 직장폐쇄에 대한 설명은 보이지만, 이러한 극단적 방법들이 몰고 올 경제적·사회적 비용에 대한 설명은 보이지 않는다.
파업이 노동자의 기본권이라고 해서 언제나 합법이거나 권장해야 할 사안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교재는 파업이나 태업 등으로 사회가 지불해야 할 비용, 그리고 소비자의 막대한 불편 등에 대해 언급하기보다 노조파업 같은 갈등이 가져올 긍정적 변화만 부각시키고 있다.
이러한 ‘갈등 미화’식의 수업이 학생들에게 어떤 영향을 가져다줄지 불 보듯 뻔하다. 곳곳에 무조건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는 것만이 정의롭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내용이 넘친다.
‘고용의 유연성’은 빠진 파업과 투쟁 속에서 아이들이 무엇을 배울까. 이 세상에 노동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해고가 자유로울 때 새로운 고용이 창출된다. 노동자의 안정적 고용과 적절한 대가를 위해서는 기업의 역할이 필수적이다. 그럼에도 이 교재는 기업의 역할, 기업의 소중함은 가르치지 않고 노동의 역할만 강조하고 있다.
이 교재 마지막에는 노조의 ‘분쟁해결 사례’로 2004년 택시 회사 노조원의 분신(焚身)사건을 들고 있다. 노동자의 권리 존중을 위해 분신도 불사하는 권리 교육이 생명의 존중 교육보다 더 중요한 교육일까.
비정규직이 당당한 사회? |
《노동인권지도자료》는 비정규직의 문제도 노동자의 단결과 파업 등을 통해 접근한다. |
〈실버 노동 박람회〉 단원에서 다루는 것은 노인 문제인가, 노동 문제인가. 노동시장에서 문제가 되는 것 중 하나가 노년(老年) 빈곤층 문제다. 노인 문제를 축소시키고 그런 문제에 봉착하지 않도록 대비하려면 노인이 되기 전 개인적 차원의 노력이 필수다. 그러나 이 교재에서는 ‘실버 노동’의 문제를 스스로의 힘으로 노년을 대비하지 못한 채 노년을 맞은 빈곤층 노인에게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노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경비원과 청소원뿐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노인 대상 돌봄 서비스, 택시 노동자 등 우리 사회에서 실버 노동을 담당하고 있는 노인들의 취약점을 언급한다. 최근 늘고 있는 노인 취업을 소개하며 일본의 착한(?) 기업이 실시하는 ‘노인의 맞춤형 일자리’ 창출을 위한 사업 등을 예시로 든다. 그러나 사실 이 모든 것은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확보하게 된다면 해결이 가능한 일들이다. 하지만 그런 부분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비정규직이 당당한 사회〉 단원에서는 비정규직 근로자와 정규직 근로자, 남성과 여성 근로자 사이에 어떤 차이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대립적 시각으로 조망한다. 비정규직 근로자 중 여성 근로자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고, 그에 따른 격차가 증가하고 있다고 설명하면서 동일 사업체 내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성·연령·학력·경력·근속연수 등이 같다고 가정했을 때 임금의 격차가 생긴다고 기술했다.
‘동일한 조건일 때 동일 임금’을 주장하는 논리는 현실적으로 맞지 않는다. 외형적으로 동일한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듯 보여도 내용적으로 볼 때 개인의 차이는 결국 결코 동일한 노동의 질(質)을 보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유’보다 ‘평등’ ‘連帶’ 강조 이 교재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 격차를 9.4%라고 하면서, 비정규직 근로자의 근로 여건이 주당 평균 32.6시간으로 최근 3개월간 월(月) 평균임금이 156만5000원이라고 한다. 유연성을 전제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본인의 선택에 의해, 자유로운 근무 조건이 보장되는 비정규직을 선택할 수도 있건만 그런 부분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본 교재에서는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한 방안으로 비정규직을 서서히 정규직으로 전환해주고 비정규직 노동자에게도 4대 보험을 전면적으로 적용하는 등 노동자의 권리를 누릴 수 있게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처음 채용될 때는 비정규직이더라도 정규직으로 전환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제안이다! 그러나 그럴 경우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시킬 때 비용은 고스란히 기업의 몫이다.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시키라고 법으로 강제하지 않으면 도리어 기업이 자연스럽게 유연한 대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라도 능력 있고 업무 효율이 높다면 기업에서 결코 그런 비정규직 노동자를 놓치고 싶지 않으므로 정규직으로 전환시키려 할 것이다. 아울러 정규직 노동자라도 업무 능력이 떨어진다면 자연스럽게 해고할 수 있어야 한다. 해고가 자유로워야 고용도 자유로울 수 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으로 전환은 강제하면서 정규직의 해고는 자유롭게 할 수 없도록 만들어놓은 것이 모순인 것이다.
〈레미제라블 그들이 꿈꾼 세상은?〉 단원에서는 프랑스 7월혁명과 2월혁명에 대한 내용을 소재로 프랑스 전역에 확대된 자유주의를 소개한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권리를 획득하기 위해 프랑스 국민이 선택한 방법이 ‘연대(連帶)’였음을 강조하면서, 자연스럽게 바로 이어 노동 인권의 발전으로 넘어간다. 빈 체제(Wiener System) 이후 프랑스의 자유주의 혁명은 이러한 혁명을 통해 왕정이 무너지고 시민들에 의한 자유가 강화되었다. 그러나 이 책은 자유를 위해 높이 든 깃발에서 ‘자유’를 빼고 노동자의 ‘평등’만 가르치려 든다. 교재의 맨 마지막 줄을 보자.
“노동자들이 함께 모이니 이전보다 영향력이 커졌지요.”
이 교재가 프랑스의 자유주의 혁명을 통해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는 이 한 줄뿐이었을 것이다. 결국 이 단원을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는 오직 ‘노동자의 연대’인 것이다.
‘失業 탈출’은 정부 지원으로 |
《노동인권지도자료》는 실업문제와 관련, 정부 지원에 대해 비판적인 주장을 ‘몰인정한 것’으로 몰아간다. |
한편 이 교재는 시대 변화에 따른 사회구조 변화를 읽지 못하고, 그로 인해 발생할 직업 간 갈등에만 주목한다. 〈4차 산업혁명에서 살아남기〉 단원에서, 인공지능 서비스 듀플렉스 또는 로봇이 등장해 사라지는 직업들로 인해 노동인권의 침해가 나타날 수 있음을 역설한다. 로봇이 대체하기 쉬운 직업과 대체하기 어려운 직업 등을 같이 제시하면서도 4차 산업혁명으로 사라지게 될 직업에 대해서만 주목한다. 4차 산업사회가 도래함에 따라 새롭게 늘어나거나 유망해질 많은 직업이 있다. 일자리 구조가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사회구조의 변화를 언급하지 않으며 갈등에만 집착하는 것이다.
〈실업 탈출 게임〉 단원이 있다. 실업에서 탈출시키기 위해 국가에서 실업자를 도와주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을 찾도록 한다. 여러 가지 상황 카드를 주고 실업에서 벗어나기 위한 게임을 하게 한다.
이 교재는 구조적 실업이든 마찰적 실업이든 실업을 벗어나는 데는 정부 지원이 강력한 대안(代案)이 된다고 강조한다. 물론 예상 가능한 반론(反論)도 언급한다. ‘많은 세금을 내야 할 사람들이 반대할 것’이라고 하면서 ‘그 반대자들이 매우 몰인정한 사람들’이라는 표현도 서슴지 않는다. 이런 반론을 제기하는 납세자들은 ‘자기들이 내는 세금으로 왜 실업자를 도와줘야 하느냐’ ‘세금이 아깝다’고 말하는 몰인정한 존재로 묘사되어 있다.
‘실업자는 어떻게 먹고사나요’라는 읽기 자료에서는 사회안전망을 제안한다. 〈대단한 유혹〉이라는 캐나다 영화를 소개한다. 영화에 나오는 한 마을 주민 120명은 모두 직업이 없지만 8년간 한 명도 굶어 죽지 않았다면서, 다시 취직할 때까지 국가가 그 사람들을 거의 완벽하게 지켜줬다고 한다.
그러나 120명을 먹여 살리기 위해 그 지역을 제외한 다른 국민이 얼마나 열심히 세금을 갖다 바쳤을지는 말하지 않는다. 실업 탈출을 가르치는 단원에서 실업에서 벗어나기 위한 개인의 노력을 강조하기보다는 모든 것을 국가가 알아서 해주는 것만이 최선인 것처럼 가르친다. 결국 타인(他人)의 힘에 기대 살아가고자 하는 인간을 양성하는 교육이 인권 교육이라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착한 무역’으로 世界化하자고? |
《노동인권지도자료》는 스마트폰 등 주요 교역상품의 세계적 흐름을 살펴보면서 종속이론적 관점을 드러낸다. |
이 교재에서 세계화는 ‘악당’이 된다. 〈상품의 여행〉 단원을 통해서 세계화의 부정적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청바지·스마트폰·커피·신발 등이 생산된 곳으로부터 세계 여러 곳으로 유통되는 과정을 통해 가난한 나라의 노동자는 더욱 착취당하고 가난해진다고 말한다. 세계화가 부(富)의 불균형을 전(全) 지구적으로 가져오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공정무역의 필요성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대한민국도 한때는 최빈곤국 중 하나였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노동을 해야 국가가 전반적으로 빈곤에서 탈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교재는 경제 불균형만 강조하고 있을 뿐, 이런 세계화가 각국의 노동시장에 주는 긍정적 영향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어떤 형태로든 생산활동에 참여하는 노동자들이라야 다음 단계의 나은 삶을 위해 노력도 하고 미래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기회도 가져볼 수 있을 것이다. 노동시장이 형성되어 숙련된 노동자가 생겨나고 보이지 않는 일자리들도 생겨날 때, 전 세계적으로 보면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기회도 생기고 빈곤을 극복하게 될 것이다. 이 교재는 그런 사실은 말하지 않는다. 그저 주변부와 중심부의 착취 구조에만 고착화된 시각을 강요하고 있다. 해묵은 ‘종속이론’이 부활한 것이다.
이 교재는 공정무역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빈곤국가의 아동 노동착취 문제를 다룬다. 〈21세기 올리버 트위스트〉 단원에서 산업혁명 직후 심각했던 아동 노동 실태를 고발하며, 오늘날 아동의 노동착취 문제를 개발도상국의 저임금 구조와 연결시켜 짐바브웨·코트디부아르·콩고 등의 아동 노동착취 문제를 강조한다. 그러나 국가 차원에서 ‘탈빈곤’ 없이 국가 전체가 빈곤한데 아동 노동착취 해결만을 위해 ‘착한 무역(?)’을 하면 문제가 해결되는가? 이 교재는 공정무역, 착한 무역이 길게 보면 특정 작물로만 수요를 집중시키고, 보이지 않는 일자리는 사라지게 하는 등 시장을 왜곡시킬 수 있다는 것은 가르치지 않는다.
전태일, 전태일, 또 전태일 |
전태일에 대해 《노동인권지도자료》는 24개 단원 가운데 3개 단원을 할애하고 있다. |
교재는 전체 24개 단원 중 3개 단원을 전태일에게 할애하고 있다. 〈전태일이 묻다〉 〈노동인권 시네마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서울시 미래유산 체험: 전태일 따라 걷기〉.
과거의 전태일이 현재 시대의 노동감독관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게 함으로써 과도한 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가 현대 오늘날의 노동 조건에 대해 질문하는 형식으로 단원을 구성하고, 드라마 〈시그널〉의 모티브를 이용해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형식의 글쓰기도 시도했다.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언급하며 다시 소환한다.
《전태일 평전》은 전태일이 자신의 의지에 의해 분신했다는 설과 누군가 전태일에게 불을 붙였다는 설, 두 가지가 존재한다. 두 가지 중 어느 것이 진실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당시 노동 조건과 근로기준법을 연구한 학자에 따르면, 전태일이 노동자로 살던 때의 근로기준법은 1960년대에 만들어졌고, 당시 사업 구조와 근로 기준에 비춰봤을 때 현실성이 매우 떨어지는 이상적 기준이라고 했다. 근로시간과 유급휴가, 그리고 가산임금 기준 등은 당시 지켜지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런 현실에 격분한 전태일이 1970년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분신한 것이다. 법을 지키지 않는 당시 기업주나 근로감독관이 처벌되지 않은 것은 잘못이다.
당시 노동자 급여 수준으로 볼 때 전태일은 결코 적지 않은 급여를 받고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열악한 다른 노동자들의 현실을 고민하면서, 그런 상황을 고발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전태일은 이타적(利他的)인 사람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 교재는 전태일의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노동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방법인 것처럼 다루고 있다. 노동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결국 자신을 불사른 선택에 대해 감수성이 예민하고 판단력이 아직 미숙한 청소년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이상적인 이야기만 떠들며, 분신한 노동자를 투사로 떠받들고 영웅으로 만드는 교육이 생명의 존엄성을 강조하는 인권 교육보다 우선해야 하는가. 어떤 것이 진정한 인권 교육인가.
친절하지만 위험한 교재 인권 교육 자체는 필요하다. 그러나 편향된 관점만 강조하는 것이 걱정스럽다. 이 교재의 표지에는 ‘창의’와 ‘혁신미래’를 지향한다고 써 있다. 그러나 ‘노동자 인권 교육’을 강조하는 것만으로 미래 사회에 뛰어들 청소년들에게 과연 바람대로 창의와 혁신이 구현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혁신이란 기업가 정신과 맞물려 있다. 그러나 기업과 함께 나아가는 노동자가 아니라 대척점(對蹠點)에서 억압받고 갈등 상황에 처해 있는 노동자만을 강조하고, 기업이 해야 할 역할의 언급은 전무(全無)한 이 교재가 미래 사회를 대비할 청소년들에게 혁신을 가져다줄 수 있을까?
이 교재는 현재 교육과정에서 다뤄지는 공통 과목과 일반 선택 과목, 창의적 체험 활동의 동아리 활동, 자율 활동, 봉사 활동 심지어 진로 활동에 이르기까지 전 교과, 전 영역과 연계 가능하도록 교육과정 핵심역량 강화와 교수학습 전략으로 내용을 구성했다. 교과와의 연계는 물론 교사들이 기술하기 번거로워하는 성취 기준 제시, 학습 목표 기술과 교수학습 과정안 작성, 그리고 학생활동지, 읽기 자료, 학습 자료, 학습지까지 포함시켜 별도의 고민 없이 수업시간에 바로 투입할 수 있는 친절한(?) 형태의 교재다. 교수학습 평가 전략에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교수학습 방법을 동원하여 노동운동과 노동현장에서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활동으로 녹여내고 있다.
그래서 더욱 우려스럽다. 통합적 혹은 융합적 수업, 인권 역량강화 수업…. 그럴듯한 명분을 제공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수업을 위한 재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 인권을 주제로 ‘수업연구’를 하는 교사에게는 좋은 점수가 주어지고 상도 이루어진다면 이 교재의 활용도는 더욱 높아질 것이다, 색다르게(?) 재미있어 보이는 수업에 길든다면 우리 아이들의 생각은 언더도그마(Underdogma·약자를 선으로 보고 강자를 악으로 보는 이분법적 생각)에 고착될 것이고, 미래를 저당 잡힌 채 ‘전 국민의 노동자화’ 틀에 갇히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