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송의달의 코리아 프리즘] ‘독재자, 美의 앞잡이, 분단 원흉’...이승만에 대한 3대 가짜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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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1-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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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건국 대통령을 둘러싼 3가지 진실과 거짓

우남(雩南) 이승만(1875~1965) 대통령은 적어도 세 가지 최초 기록의 보유자다. 미국 <타임(TIME)>지(誌) 표지(1950년 1016일)에 등장한 최초의 한국인, 미국 대학교에서 최초로 박사학위(1910년)를 받은 한국인, 뉴욕 시내 브로드웨이에서 카퍼레이드(1954년 8월2일)를 한 최초의 외국 국가원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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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8월부터 1960년 3월까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재임한 이승만 박사/이승만연구원
1947년 미 군정청(軍政廳)이 1000명의 서울 시민을 상대로 실시한 ‘대통령 후보자 여론조사’에서 이승만(43.9%)은 김규식(18.5%), 여운형(17.5%), 김구(15.2%)를 2~3배 차이로 압도했다. 그의 장례식날(1965년 7월 27일)에는 영결예배 장소인 서울 중구 정동제일교회에서 남대문, 제1한강교를 거쳐 동작동 국립묘지까지 100만명 넘는 시민들이 나와 애도(哀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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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과 그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영면해 있는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묘역/송의달 기자
이런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봉건주의(조선), 제국주의(일본), 공산주의(북한)와 싸워 자유 대한민국의 기초를 놓았다”는 예찬과, “제국주의 미국의 앞잡이로 국립묘지에서 파내야 할 대상”이라는 비판이 첨예하게 맞선다. 세가지 쟁점에서 진실과 거짓[眞僞]을 검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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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7월 27일 가족장(家族葬)으로 치뤄진 이승만 대통령 장례식에 100만여명의 시민들이 거리에 나와서 애도하고 있다. 이 사진은 이승만 대통령이 폭넓은 국민적 존경을 받았다는 물증이다./공보처
①‘종신 집권 독재자’?...12년간 11번 전국 단위 자유 선거 실시

이승만에 대한 가장 흔한 비판은 ‘종신 집권’ 욕심에 사로잡혀 헌정(憲政)을 파괴한 독재자라는 주장이다. 1960년 3.15 부정 선거와 1954년 11월 27일 국회에서 이뤄진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이 근거로 꼽힌다.

먼저 3.15 부정선거는 ‘이승만’이 아니라 부통령 후보 ‘이기붕(1896~1960)이 자신의 당선을 목표로 주도한 것이었다. 대통령 선거의 경우, 야당 후보이던 조병옥 박사가 선거 한 달 전에 미국으로 치료차 갔다가 현지에서 사망해, 단독 대통령 후보가 된 이승만은 사실상 당선된 상태였다. 이승만의 유고(有故)시 대통령직을 승계할 부통령에 이기붕이 당선되려고 투표함을 바꾸는 부정선거를 자행한 것이다.

3.15 부정선거는 ‘부통령’ 부정 선거

더욱이 부정 선거를 주모한 자유당 강경파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김주열 군 시신 발견(4월 11일)과 경찰 발포로 수백 명의 사상자 발생(4월 19일) 등을 축소보고했다. 이들은 4월 21일에야 부정 선거를 자백하고 전원 사표를 냈다. 이승만은 4월 23일 시위 부상자들이 있는 서울대 병원을 찾아가 “부정(不正)을 보고 일어서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다. 이 학생들은 참으로 장하다. 내가 맞을 총알을 너희가 맞았다”고 격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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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이 1960년 4월 23일 부정 선거 규탄 시위 중 부상당한 학생들이 입원해 있는 서울대 병원을 직접 찾아가 위문하며 격려하고 있다./국가기록원
전문가들은 “이승만이 영구 집권을 꿈꾸는 야심가라면 단독 후보로 치러진 대통령 선거는 문제될 게 없었으므로 부통령 재선거 지시만으로 충분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승만은 4월 28일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도 물러나는 게 민주주의다”며 스스로 하야(下野)했다. 그는 퇴임후 각국 수반의 위로 편지를 받고 쓴 답장에서 “나는 지금 가장 행복하다오. 부정을 보고 궐기하는 백성들이 나라를 지키니 이런 날을 평생 기다렸기 때문이요”라고 했다. 이는 일각의 주장처럼 ‘종신(終身) 통치를 획책한 독재자’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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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8월 15일 서울시 광화문 뒷편 옛 중앙청에서 거행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조선일보DB
사사오입 개헌 목적은 ‘자유시장 경제’ 착근

1954년의 ‘사사오입’ 개헌 논란도 입체적인 천착(穿鑿)이 필요하다. 이 개헌의 주 목적은 자유시장 경제 체제 착근(着根)을 위해 제헌헌법 내 사회주의적 경제 조항을 삭제하는 것이었다. 제헌헌법을 확인한 결과, ‘국민 재산권 사용 제한’(제15조), ‘노동자의 기업내 이익 균점권(均霑權) 인정’(18조)을 비롯해 기업 국유화·공유화 인정 같은 반(反)자유시장 경제 조항(제85, 제87, 제88, 제89조)들이 수두룩했다.

부칙(附則)에 명시된 ‘(헌법 개정 당시) 현 대통령의 연임 제한 폐지’ 조항이 ‘종신 집권’을 가능케 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6.25 전쟁에서 공산화 직전의 나라를 구해내고, 미·소간의 첨예한 냉전 구도에서 뛰어난 국제 감각의 소유자로서,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쳐온 이승만 대통령은 당시 한국민에게 ‘특별한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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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대외 원조 물자 발송 협회(CARE)’의 원조를 받은 한국 어린이들이 급식을 먹는 장면(사진 위)과 유엔 한국재건단(UNKRA) 관계자들이 1959년 구호물자 전달을 참관하는 모습/조선일보DB
이승만 연구가인 인보길 뉴데일리 회장은 “사사오입 개헌 당시 이승만은 만 79세 8개월, 즉 우리나라 80세 노인이었다. 죽기 전에 그가 대통령을 하면 몇 번이나 더 할 수 있었을 건가. 더구나 당시 국민 대다수는 그를 국부(國父)로 추앙하던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승만이 대통령에 불출마했을 경우, 남한이 공산화될 우려도 한 이유로 꼽힌다. 실제로 1954년 12월1일 뉴욕 UN총회차 참석한 변영태 총리는 기자회견에서 “만약 이승만 대통령이 퇴임한다면 수십 명의 우익 후보가 출마해 전국의 우익(右翼) 표를 나누게 될 것이며, 이렇게 되면 좌익 후보가 당선될 것”이라고 했다.

이승만 12년은 한국史 초유의 ‘자유 확장’ 시대

이승만 대통령의 집권기간(11년 8개월) 중 정당·정치 결사(結社)의 자유가 보장되고, 제헌의회 선거를 포함해 모두 11차례의 전국 선거가 실시됐다는 점도 주목된다. 왕과 양반 남성들이 독점하던 자유가 국민 전체로 확산되는, 한국 역사상 초유(初有)의 ‘자유의 확장’이 전면적으로 벌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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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집권 12년여 동안 실시된 전국 단위 선거/<이승만 깨기> 27쪽 캡쳐
김광동 나라정책연구원장은 “전국 단위의 자유민주 선거를 거의 1년에 한 번씩 12년간 거르지 않고 치르고, 정당 설립의 자유를 허용하고, 자신이 아닌 부하들이 저지른 부정 선거의 책임을 지고 자진 사퇴한 대통령이 과연 독재자일까”라고 했다.

②미국의 ‘하수인’?...美와 싸우며 ‘한국 이익’ 챙겨

두 번째는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의 세계적 냉전 정책에 편승해 미국의 국가 이익을 추종하고 조국은 내팽개친 미국의 앞잡이’라는 주장이다. 실상(實相)은 어땠을까. 1945년 10월 16일 망명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만 70세의 이승만은 한국에 먼저 와 있던 미 군정 당국과 사사건건 충돌한 게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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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군정기(1945~48년) 한국 정치를 움직인 3인방. 왼쪽부터 이승만 박사, 김구 선생, 하지 미 군정청 사령관(중장)/조선일보DB
양측이 ‘물과 기름’처럼 어울리지 못한 이유는 자명했다. 미 군정 당국은 공산 세력의 팽창 저지를 겨냥한 봉쇄 정책을 골자로 한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 발표(1947년 3월) 전은 물론 그 후에도 한참동안 소련과 협조해 한반도에서 좌우(左右) 합작 정권을 세우고자 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신탁통치 반대와 반(反)공산주의를 내걸고 자유민주적인 통일 정부를 수립하고자 했다.

이승만, 하지 美 사령관과 충돌...가택연금 당해

이승만과 미 군정청의 존 하지(John RHodge) 중장(군정 사령관)은 공개적으로 인신 공격을 벌이며 여러번 부딪쳤다. 미 군정청은 1946년 12월 국무부에 보낸 전문에서 “이승만은 우리에게 골칫거리(nuisance)”라고 했다. 1947년 5월 21일부터 미소(美蘇)공동위원회 2차 회의가 서울 덕수궁에서 열리는 동안, 미 군정청은 이승만을 가택(당시는 돈암장 거주) 연금시켰다.
그가 회의 진행에 방해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승만은 라디오 방송 출연 금지와 전화기 철거, 편지 검열 등을 당했다. 당시 정치 상황을 연구한 김명섭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1946~47년 미 군정청은 이승만을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했고 관계도 나빴다. 미국 워싱턴 DC에서도 두 사람은 설전을 벌였다. 하지 사령관은 한국에서 이승만을 배제하고 서재필을 대안으로 유력하게 검토해 서재필을 한국으로 초청했다. 미 군정이 이승만을 지지했다거나, 이승만이 미국의 정책을 잘 따라서 그가 대통령이 됐다는 주장은 모두 부정확하고 의도된 왜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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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8월 독도에 설치된 등대와 그 밑 바위에 새겨진 '한국령' 표지/조선일보DB
1950년대 들어도 이승만은 미국과 툭하면 이견과 마찰을 빚었다. 1952년 1월18일, 이승만은 독도(獨島)를 포함한 해양 경계선(일명 ‘이승만 라인’)을 일방적으로 긋고, 독도에 등대 건설과 군 부대 주둔을 강행했다. 일본은 물론 미국까지 전면 철회를 강력 요구했지만, 그는 요지부동했다. 1953년 6월 18일에는 2만7000여명의 반공(反共)포로들을 상의없이 일방적으로 석방시켜 미국을 격분시켰다.

美, ‘이승만 제거’ 비밀 계획 두 차례 실행 검토

미국 정부와 주한미국대사관은 부산 정치파동(1952년) 무렵과 반공 포로 석방 후 무렵 이승만을 제거하고 한국내 새 정부를 만드는 극비 계획인 ‘에버 레디 플랜(Ever Ready Plan)’을 마련해 실행을 심각하게 검토했다. 그러나 이승만에 대한 한국 국민들과 군부의 높은 지지 때문에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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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이 1952년 12월 3일 한국을 방문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당선인을 맞아 악수하고 있다./조선일보DB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일기장에서 “이승만은 마음에 들지 않는 동맹자(unsatisfactory ally)였다”고 썼다. 그는 측근인 알렌 덜레스 CIA 국장에겐 “이승만은 우리의 친구가 아니라 적(敵)이다”고 말했다.

한해 정부 세입 보다 많은 美 원조 받아내

이승만이 이런 평가를 들은 것은, ‘미국 이용하기’, 즉 미국의 경제적 도움을 받아내는데 세계 최빈국 지도자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뛰어난 협상력과 수완(手腕)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일례로 이승만은 1953년 10월 1일 미국과 맺은 상호방위조약에서 “한국이 제자리 잡을 때까지 한국 국방비를 미국이 전액 부담한다”는 조항을 만들어 관철시켰다. 좌파 정치학자인 브루스 커밍스 박사(전 미국 시카고대 교수)는 이렇게 밝혔다.

“한국 정부의 국내 세입(歲入)이 4억5600만 달러였던 1957년, 이승만은 미국으로부터 3억8300만 달러의 경제 원조를 끌어들였다. 거기에다 그해에 군사 원조로 4억 달러를 추가하고 주한미군 경비로 또 3억 달러를 추가했다.”(<브루스 커밍스의 한국 현대사>, 431쪽)

1957년 한국 정부가 거두어 들인 수입의 두 배 이상을 미국 정부로부터 뜯어냈다는 것이다. 커밍스는 자신의 저서에서 “(1953년부터 59년까지 미 국무장관을 지낸) 존 포스터 덜레스(Dulles)는 이승만에 대해 ‘동양의 흥정꾼’, ‘회피의 명수(名手)’라고 품평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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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워싱턴 D.C 포토맥강 가까이에 있는 한국전 참전기념 공원/연합뉴스

차상철 충남대 사학과 교수는 ‘외교가로서의 이승만 대통령’이라는 논문에서 이렇게 밝혔다.

“수 십년 동안 미국이 (한국에 대해) 저지른 배신 행위와 기만, 무관심 같은 쓰라린 체험을 한 이승만은 맹목적 친미(親美)주의자가 아니라 미국의 정치와 외교의 속성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철저한 ‘지미(知美)주의자’가 됐다. 그는 한국의 독립과 생존 확보를 위해 미국을 반드시 붙잡아야만 하는 ‘유일한 국가’라고 믿었던 철저한 용미(用美)주의자였다.” (<이승만 대통령 재평가>, 160쪽)

③남북 분단의 원흉?...북한과 소련이 먼저 단독 정부 추진

“무기(無期) 휴회된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할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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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박사의 정읍 발언을 보도한 1946년 6월 4일자 서울신문 1면 기사.
1946년 6월 3일 이승만 박사가 전북 정읍에서 한 이른바 ‘정읍 발언’이다. 이 발언으로 말미암아 이승만에겐 미국과 손잡고 남한 단독 정부를 세운 ‘민족 분단의 책임자’이자 ‘협잡(挾雜·옳지 않은 방법으로 남을 속임)꾼’이란 꼬리표가 붙어 다닌다. 진실은 어떨까?

정작 그의 발언 일주일 후인 그해 6월 10일 미군정청 장관이던 아서 러치(ALLerche) 소장은 기자회견에서 “그 발언은 이승만 개인의 소견일 뿐이다. 나는 군정장관으로서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전연 반대한다”고 했다. 이는 이승만이 미국의 괴뢰(傀儡)가 되어서 남한 단독 정부를 세운 게 아님을 보여준다.

北은 1946년 2월 8일 사실상 정부 세워

1945년부터 48년까지 3년 동안 한반도 정치 상황을 보면, 남·북한 양쪽에서 각기 국가 수립이 추진됐다. 특히 1990년대 이후 비밀 해제된 소련측 기밀문서들을 분석한 전문가들은, 단독 정부 추진은 남한 보다 북한에서 먼저 이뤄졌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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